척추를 단순한 지지대가 아닌 ‘움직임의 엔진’으로 본 그라코베츠키…현대 보행·달리기 연구도 몸통과 골반의 역할 재조명
사람은 어떻게 걷고 달릴까. 가장 익숙한 설명은 단순하다.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 근육이 힘을 만들고 관절을 움직이며, 발이 지면을 밀어 몸을 앞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반면 몸통과 척추는 그 위에 안정적으로 얹혀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약 40년 전 이러한 관점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연구자가 있었다. 캐나다의 연구자 Serge Gracovetsky다.
그는 1985년 Journal of Biomedical Engineering에 발표한 「An hypothesis for the role of the spine in human locomotion: A challenge to current thinking」에서 인간 보행을 다리 중심으로 설명하는 기존 관점을 비판하며, 척추와 그 주변 구조가 인간 locomotion, 즉 이동 운동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계적 시스템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후 이 개념은 ‘Spinal Engine’, 즉 ‘척추 엔진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했다.
물고기에서 인간까지…“움직임의 시작은 척추였다”
Spinal Engine 이론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두 다리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물고기를 생각해야 한다.
물고기는 다리가 없어도 앞으로 이동한다. 몸통과 척추를 좌우로 굽히는 lateral bending을 반복하고, 이 움직임이 물에 힘을 전달하면서 추진력을 발생시킨다.
Gracovetsky는 진화 과정에서 사지가 등장했다고 해서 척추가 가지고 있던 원래의 locomotor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1988년 Springer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The Spinal Engine은 바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초판은 505쪽에 달하는 책으로, 단순히 허리 통증이나 척추 안정성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간 보행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개정판의 도서 설명에서도 Gracovetsky는 전통적인 관점이 보행을 거의 다리의 기능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척추를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primary engine으로 보는 것이 책의 핵심 주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엔진이 물고기 조상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인간이 물고기처럼 척추를 크게 좌우로 흔들며 걷는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Spinal Engine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coupled motion, 즉 척추의 결합운동이 등장한다.
척추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인체의 척추는 단순한 경첩이 아니다.
허리를 옆으로 굽히면 순수하게 lateral flexion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척추 분절의 형태와 정렬, 관절 구조 등의 영향으로 axial rotation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 반대로 회전 역시 다른 평면의 움직임과 결합된다.
Gracovetsky는 인간의 요추 전만과 척추의 3차원 구조가 이러한 결합운동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모델에서 척추의 lateral bending은 axial torque로 변환되고, 이 torque가 골반 회전에 기여한다.
1997년 발표한 「Linking the spinal engine with the legs: a theory of human gait」에서 그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다. 인간의 lordotic spine이 물고기의 원시적인 좌우 굽힘 운동을 축회전 torque로 변환해 골반을 움직이는 것이 Spinal Engine의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즉,
척추 측굴 → 척추의 결합회전 → 골반 회전 → 다리의 전진
이라는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초기 Spinal Engine 이론의 중요한 생각이었다.
이는 보행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를 뒤집는다.
전통적 모델에서는
다리가 움직인다 → 골반이 움직인다 → 몸통이 따라간다
고 생각했다면,
강한 형태의 Spinal Engine 모델에서는 오히려
척추가 움직인다 → 골반이 회전한다 → 하지 움직임이 연결된다
는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골반과 어깨가 반대로 움직이는 이유
실제 사람의 보행을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오른쪽 다리가 앞으로 나갈 때 오른쪽 팔은 뒤로 이동한다. 골반과 흉곽 역시 완전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위상차를 가지고 회전한다.
특히 보행 속도가 증가하면 pelvis와 thorax의 transverse-plane coordination은 변화한다. 연구에 따르면 빠른 보행에서는 골반의 회전이 보폭을 늘리는 이른바 ‘pelvic step’에 기여하며, 흉곽과 골반 사이에는 특징적인 counter-rotation이 나타난다.
이 현상은 Spinal Engine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골반과 흉곽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키면 몸 전체가 한 덩어리로 좌우 회전하는 것을 줄이면서도 골반의 운동범위를 확보할 수 있다. 척추는 단순히 두 구조 사이에서 버티는 기둥이 아니라, 여러 척추 분절을 통해 회전이 분배되는 동적인 구조가 된다.
실제로 보행 속도가 증가할수록 trunk의 axial stiffness 역시 변화하며, 연구에서는 이런 stiffness 증가가 빠른 보행에서 요구되는 trunk rotation의 높은 주파수와 recoil에 도움을 줄 가능성이 제시됐다.
따라서 현대 보행역학에서도 “몸통은 다리에 실려 가는 수동적인 승객”이라는 단순한 설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팔 흔들기도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Spinal Engine을 이해할 때 팔의 움직임도 빼놓기 어렵다.
사람이 걸을 때 팔을 반대로 흔드는 이유를 과거에는 단순히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운동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연구에서는 arm swing이 몸통의 angular momentum을 조절하고, 몸의 회전에 필요한 muscular torque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달리기에서도 팔 흔들기를 제한하면 대사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보고됐다.
결국 인간 보행은
다리 두 개가 번갈아 움직이는 단순한 pendulum system이 아니라,
팔–흉곽–척추–골반–하지가 서로 회전운동과 각운동량을 교환하는 전신 시스템
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Spinal Engine이 현대 운동학에 던진 가장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다.
1987년에는 ‘에너지의 흐름’까지 설명하려 했다
Gracovetsky와 Iacono는 1987년 「Energy transfers in the spinal engine」을 발표하며 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 논문의 출발점 역시 기존 보행 모델에 대한 의문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생각에서는 다리가 locomotion을 만들고 trunk는 비교적 수동적으로 운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저자들은 척추와 주변 조직이 locomotion의 기본적인 engine을 구성할 가능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engine’이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자동차 엔진처럼 받아들이면 오해하기 쉽다.
Spinal Engine이 말하는 engine은 특정 근육 하나가 모든 추진력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보다는, 척추의 움직임과 중력, 근육의 힘, 골반 운동, 탄성구조, 하지의 힘이 상호작용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재활용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특히 Gracovetsky는 걷기와 달리기에서 중력장의 역할에도 주목했다.
몸의 질량중심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여러 신체 분절이 회전하면서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가 반복적으로 교환된다. 좋은 locomotion은 매 순간 근육이 모든 에너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기계적 에너지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리는 필요 없는 것인가?
Spinal Engine 이론에서 가장 도발적으로 들리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Gracovetsky는 다리가 없는 사람이 좌골을 이용해 이동하는 사례와 무릎으로 걷는 움직임 등을 근거로, ‘다리가 없어도 척추의 locomotor pattern 자체는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97년 글에서도 그는 하지가 없는 사람에게서 관찰된 trunk kinematics와 EMG pattern이 정상 보행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척추의 운동 패턴이 단순히 다리 움직임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것을 “다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해석하면 Spinal Engine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Gracovetsky 역시 후기 모델에서는 하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특히 빠르게 이동하려면 더 많은 mechanical power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큰 근육량을 가진 hip extensors 등 하지와 골반 주변 근육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1997년의 확장된 모델은 제목 자체가 ‘Linking the spinal engine with the legs’였으며, 척추와 다리를 하나의 통합된 locomotor machine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후기 Spinal Engine은
“척추 대 다리”
라는 이분법보다는
“척추와 다리를 어떻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에 더 가깝다.
40년 뒤 연구에서 뜻밖의 결과도 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Spinal Engine이 제기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lumbopelvic region의 locomotor contribution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Journal of Biomechanics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건강한 남성 러너 10명을 대상으로 2·3·4·5m/s의 달리기를 musculoskeletal simulation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late stance와 early swing에서 lumbopelvic axial moment가 하지 질량중심을 전방으로 가속시키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하는 것으로 계산됐다. 연구에서 axial lumbopelvic moment의 상대적 contribution은 조건에 따라 약 44.1~54.7% 수준이었으며, 달리기 속도가 증가하면서 그 상대적 역할도 증가했다. late swing에서 하지의 전방 움직임을 감속시키는 과정에서도 axial 및 sagittal lumbopelvic moment의 기여가 크게 나타났다.
물론 이것이 1980년대 Gracovetsky의 Spinal Engine을 그대로 ‘증명했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연구에서 말하는 lumbopelvic moment와 Gracovetsky가 제시했던 구체적인 spinal-engine mechanism은 완전히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해당 연구 역시 10명의 남성 러너를 대상으로 한 simulation 연구라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몸통과 요골반 영역이 단순히 하지에서 발생한 힘을 안정화하는 수동적 플랫폼에 불과하지 않고, 하지의 가속과 감속 과정에 역학적으로 기여한다는 결과는 Spinal Engine이 40년 전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고 ‘Spinal Engine이 입증됐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Spinal Engine은 하나의 통합적인 biomechanical theory이지, 현재 생체역학의 모든 연구자가 받아들이는 확정된 보행 법칙은 아니다.
현대 연구에서는 하지의 힘 역시 명확하게 중요하다. 발목 plantar flexor, 무릎 신전근, 고관절 근육 등이 걷기와 달리기의 지면반력, 지지, 추진 및 limb swing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방대한 연구가 존재한다.
또 pelvis와 thorax의 counter-rotation이 관찰된다고 해서 항상 이것을 Spinal Engine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복근을 의도적으로 수축시키거나 brace를 이용해 trunk stiffness를 증가시키면 thorax와 pelvis의 상대적인 회전 패턴이 달라진다. 이는 정상 보행의 trunk-pelvis coordination이 단일한 수동적 기계 구조가 아니라 신경근 조절과 stiffness modulation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대적으로 Spinal Engine을 이해하려면
“척추가 다리를 대신해 사람을 움직인다”
라는 극단적인 문장보다,
“인간 locomotion은 발과 다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척추·흉곽·골반의 3차원 운동 역시 추진, 에너지 전달, 각운동량 조절과 하지의 가속·감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고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코어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도 질문 던져
Spinal Engine이 운동·재활 분야에서 여전히 관심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흔히 ‘코어 안정성’을 이야기할 때 척추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구조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걷기와 달리기에서 건강한 척추와 골반은 실제로 움직인다.
골반은 transverse plane에서 회전하고, 흉곽은 그와 다른 위상으로 움직이며, 척추에는 segmental rotation과 lateral bending이 발생한다.
심지어 몸통의 움직임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면 정상적인 thorax-pelvis coordination이 변한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따라서 ‘안정성’은 움직임을 제거하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이 아니다.
빠르게 달리고 던지고 치고 방향을 전환하는 스포츠에서는 오히려 필요한 순간에 몸통을 안정시키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척추와 골반의 회전운동을 만들어내고, 다른 신체 분절과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는 능력이 중요할 수 있다.
이는 stability와 mobility를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Spinal Engine의 진짜 가치는 ‘척추가 엔진인가’보다 더 크다
Gracovetsky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척추가 인간 locomotion의 ‘primary engine’이라는 강한 표현까지 현대 과학이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1985년에 던진 질문은 상당 부분 살아남았다.
“정말 다리가 몸통을 운반하는 것뿐일까?”
오늘날의 대답은 적어도 “그렇지는 않다”에 가깝다.
골반의 회전은 보폭과 연결되고, thorax와 pelvis는 속도에 따라 coordination pattern을 변화시키며, arm swing은 angular momentum과 에너지 소비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최근에는 lumbopelvic moment가 달리기에서 하지의 전후방 가속과 감속에 예상보다 큰 역할을 할 가능성까지 보고되고 있다.
결국 약 40년이 지난 지금 Spinal Engine을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척추가 진짜 엔진인가 아닌가”라는 이름 싸움이 아니다.
사람이 걷고 달리는 것을 이해하려면 발목, 무릎, 고관절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발–하지–골반–척추–흉곽–상지를 하나의 연결된 3차원 locomotor system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1980년대에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들렸던 이 아이디어가 오늘날 스포츠 생체역학에서 다시 흥미로워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Spinal Engine은 아직 완성된 정답이라기보다 인간 움직임을 바라보는 하나의 강력한 가설이다.
하지만 때로 과학에서 중요한 이론은 모든 것을 맞힌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질문의 방향을 바꿔놓은 이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리가 사람을 걷게 한다”라는 익숙한 설명에 “그렇다면 척추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던 Gracovetsky의 질문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